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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신라와 함께한 안압지 |
| 요약 |
<신라의 운명과 함께 한 안압지 안압지는 통일을 자신했던 문무왕의 전승 기념물로 출발한 것이다. 이런 통일의 상징물을 건설하는 데 신라인만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많은 유민들이 경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문무왕 14~17년에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전쟁의 열기를 다른 쪽으로 완화시킬 필요가 생긴다. 그래서 당시의 잉여노동력인 백제나 고구려인들을 신라 왕궁과 성을 조성하는데 많이 동원한다. 백제와 고구려인의 참여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일체감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의 우수한 기술이 종합된 안압지는 정치적으로도 통일국가의 새 토대로서 중요한 명소가 된다. 안압지가 새 국가 개혁의 산실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있다. 국내 최초로 다량의 목간이 출토되었을 때 이 목간에 안압지의 관청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목간에는 '세택(洗宅)'이라 씌어 있는데 이 세택은 다른 유물들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글자다. 이로써 국왕이나 태자의 비서기관이었던 세택이 안압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과 태자의 별개 직속기관인 세택은 왕권을 뒷받침하는 보좌기구로, 전제왕권의 절정기이자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던 경덕왕 때의 핵심부서인 중사성으로 발전한다. 왕을 보좌하던 역할에서 명실상부하게 개혁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통일의 기년물로 출발해 개혁의 상징으로 변모한 안압지, 이렇듯 안압지는 처음부터 연회지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안압지를 건설한 문무왕대에는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통일 국가의 틀이 잡히고 안정기에 들어선 후 안압지는 점차 연회지의 성격이 강해진다. 삼국통일 후 유례없는 안정을 누리자 동궁인 임해전을 설치하고 군신간의 연회와 축제를 벌이며 외국사신을 접대한다. 그때부터 안압지는 신라의 번영과 안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삼국의 문화가 융합되어 탄생한 안압지는 그렇게 신라와 함께 번영을 누리다 쇠락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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