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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대왕암 |
| 요약 |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다시 8년간 이 땅에서 당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치른 문무왕은 왕위에 오른 뒤 16년 만에 통일의 과업을 이룬다. 경주시 암곡동 동대봉산 깊숙한 골짜기의 무장사터는 경주 시내에 있는 다른 화려한 절터와 달리 그리 크지 않다. 현재 이 절터엔 부서진 귀부와 탑만이 남아 있다. 무장사라는 이름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이곳에 병기와 투구를 묻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그러나 통링의 위업을 달성한 뒤에도 여러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특히 문무왕은 주변 제국의 위협과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들의 반발, 백제.고구려 유민의 반란 등의 어려운 국면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당과의 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 만인 681년 병을 얻는다. 당시 나라를 걱정했던 문무왕의 심정이 그의 유언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워 두어서는 안될 터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장례도 치르기 전에 왕위를 계승하라는 것이었다. 문무왕은 평생의 과업이던 통일국가를 지키기 위해 죽어서 용이 되길 원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그 용이 머물 수 있도록 감은사를 지어 선왕의 유지를 잇는다. 그리고 만파식적 설화가 회자된다. 해룡이 되어 감은사에 머무른 문무왕이 신문왕에게 신비의 피리 만파식적을 전해주었다는 것은 신문왕의 적통성을 확인시키며 중요한 통치 기반이 된다. 신문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문물을 정비하는 기초를 선왕인 문무왕이 닦아준 것이다. 이후 만파식적은 강력한 왕권의 상질물이 된다. 흔히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 위엔 특이하게 용이 원통을 짊어진 형상이 보인다. 다른 시대의 종에는 보이지 않는 형태인데 상원사종에도 비슷한 모양의 원통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용이 된 문무왕과 만파식적을 상징한 것으로 삼국 통일의 위업을 후대까지 부각시킨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경주 앞바다의 대왕암은 당시 신라인의 마음에 중요한 상징적 의미로 자리잡는다. 그들은 용으로 화신한 문무왕이 이곳에 머물며 위기 때마다 나라를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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