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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삼별초의난 |
| 요약 |
<<삼별초의 난(三別抄-亂) 고려 원종(元宗) 때 일어난 삼별초의 항몽투쟁. 삼별초는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을 총칭한 것으로, 최씨정권의 사병적 성격이 짙은 집단이다. 1232년(고종19) 몽골의 침락을 피해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뒤 삼별초는 강도(江都;강화도)를 수비하는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자주 섬 밖으로 나와 전국 각지에서 몽골군과 대전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58년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이듬해, 고려의 태자 전(뒤의 원종)이 부왕인 고종을 대신하여 몽골에 입조(入朝)함으로써, 거의 30년간 계속된 전쟁이 종식되고 왕정이 복구된 듯한 형세였다.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강화도의 고려조정에서는 개경환도의 문제를 둘러싸고 10년이 넘도록 의견대립이 계속되었는데,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대개 개경환도를 희망하였으나, 삼별초의 무신들은 그것이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 하여 완강히 반대하였다. 70년(원종 11) 마침내 출륙환도(出陸還都)가 단행되고, 환도에 불응한 삼별초에게 해체명령이 내려졌으며, 그들의 명부(名簿)도 압수해 갔다. 이에 삼별초군은 그해 6월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군의 주동자인 배중손(裵仲孫)은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연안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도내(島內)의 인심이 흉흉하고 호응자가 적자 3일 뒤에는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진도(珍島)로 남하, 그곳을 근거지로 대몽항쟁을 벌였다. 진도로 이동한 삼별초는 얼마 안가서 전라도일대를 공격하고 11월에는 탐라(耽羅;제주도)까지 세력을 뻗쳐 남방의 제해권을 장악, 전라도·경상도의 조운(漕運)을 차단함으로써 정부에 큰 재정적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71년 5월 김방경(金方慶)·홍다구(洪茶丘)를 지휘관으로 하는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으로 그 세력이 크게 꺾이고,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한 여당(餘黨)들은 본거지를 탐라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다가, 73년 2월 연합군의 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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