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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의주적의 난 |
| 요약 |
<< 의주적의난(義州賊-亂) 1219년(고종 6) 지방관리의 횡포에 대하여 의주 농민들이 일으킨 난이다. 이해 10월 의주 별장(別將) 한순(韓恂)과 낭장(郎將) 다지(多智) 등이 난을 일으켜 의주 방수장군(防戍將軍) 조선(趙宣)과 수신(守臣:太守) 이체(李)를 죽이고 스스로 원수(元帥)라고 하였다. 이어 감창사(監倉使) 등의 관서를 설치하고 창고를 열어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자 인근 제성(諸城)이 호응하여 농민군은 포악한 지방관과 토호를 처단하면서 세력을 넓혀갔다. 조정에서는 조염경(趙廉卿) 등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구주(龜州:龜城)·연주(延州:寧邊)·성주(成州:成川)를 제외한 서북지방의 모든 성이 장악되었다. 다시 이극서·이적유(李迪儒)·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20년 2월 관군의 토벌공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한순과 다지는 청천강을 경계로 하여 동진(東眞:大眞國)에 투항하고 금(金)나라의 원수 우가하를 의주에 내둔(來屯)하게 하였다. 이에 중군병마지사(中軍兵馬知使) 김군수(金君綏)가 우가하에게 사람을 보내어 맹약을 어긴 것을 책하고, 한순과 다지 등 괴수를 붙들어오게 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난 뒤의 수습과정에서 종주뢰(宗周賚)가 탐욕을 부려 뇌물의 유무에 따라 잘 보아주기도 하고 이유없이 주살(誅殺)하기도 하는 등 혼란하여 윤창(尹昌)이 다시 난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번 작은 난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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