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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양무운동 |
| 요약 |
양무 운동
청나라는 서양의 문물 제도를 파악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지도 않았고 정부 조직에 대해서도 어떠한 개혁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관리가 전함과 대포를 제작할 수 있는 설계도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어도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남경 조약과 그에 수반된 추가 조약에서 드러난 불평등 조건에 대해서도 청나라 관리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다만 조약 항목 중에 차후 쌍방은 대등한 위치에서 문서를 주고받는다는 대목에 대해서 중국과 서양 오랑캐의 구분이 없어진다고 불안했을 따름이다. 남경 조약에 참여했던 중국측 대표는 도광제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여전히 서양의 국가 조직을 경시하는 내용을 담았다. 서양이 중국식의 일체화된 조직과 질서를 갖추지 못한 것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이 낮은 증거라고 주장하며 중국의 결점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편 전쟁과 남경 조약 이후로 중국은 거대한 농업 국가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수량 관리가 가능한 국가 조직으로 변해간다. 이 과정은 지극히 고통스러웠으며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1851년부터 태평 천국(太平天國)의 난이 발발하여 국내 상황은 더욱 어지러웠으며 1864년을 전후하여 난리가 평정된 것은 이미 20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뒤였다. 내우외환에 휩싸였던 중국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강해지려는 의도에서 1860-70년대 사이에 이른바 자강 운동(自强運動)을 펼치게 되는 바 「정신은 중국, 물질은 서양」(中學爲體, 西學爲用)이란 기치 아래 서양의 기술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였다. 서양의 기술에 힘쓴다는 의미에서 양무 운동(洋務運動)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 운동은 근본적인 면에서 시종 중국 문화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861년 북경에는 총리아문(總理衙門)이란 부서가 설립되어 외국 사절을 상대하고 조약으로 인해 생겨난 각종 사무를 관장했으며 동문관(同文館)이 설립되어 각국 외국어를 교수하기도 했다. 태평 천국의 난을 평정할 무렵 진압 사령관 증국번(曾國藩) 및 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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