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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백년 전쟁 |
| 요약 |
백년 전쟁(1339~1453)
영국 프랑스간의 싸움. 노르망디공 윌리암이 영국을 정복한 뒤 영국은 200년이 넘는 동안 신하의 나라로 사사건건 참견을 받아야 했다. 영국은 이러한 완전히 관계를 끊고 당당히 1대 1로 맞서고자 하였으며 플랑드르에 대하여 왕권의 신장을 기도하는 카페 왕가(프랑스)와 프랑스의 영토를 확보하여 경제적으로 플랑드르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플란타지네트 왕가(영국)의 대립이 전쟁을 유발하게 되었다. 플랑드르(프란더스)는 프랑스 북부 지방으로 당시 옷감을 짜는 기술이 없던 영국이 양털을 수출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프랑스 왕이 이곳에 많은 세금을 과세하자 플랑드르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려고 영국을 끌어들였다. 때마침 1328년 카페 왕가(987-1328)가 단절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어머니가 카페 왕조 가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발루아 왕가(1328-1589)의 필리프 6세에 대항하여 자기의 카페 왕가 상속권을 주장하고 이를 구실로 하여 전쟁을 개시했다. 전후 3차에 걸친 이 전쟁은 간헐적으로 100여 년 간 계속되었으므로 백년 전쟁이라 불리어진다. 서전에서 프랑스는 에클뤼즈의 해전에서 완패(1340)하고 크레시의 싸움에서 대패(1346), 또 1356년 프와티에 전투에서 패하여, 국왕 쟝 2세가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는 거듭되는 전란과 흑사병의 맹위로 극히 피폐되었으며 태자 샤를은 파리의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자크리의 농민 반란(1358)을 진압한 후 겨우 영국과 브레티니의 화약을 맺었다(1360). 즉위 후 샤를 5세는 군제 개혁과 왕실 재정의 강화에 노력하고 아키텐 귀족의 반항으로 동요하는 영국에 대하여 공세로 나가 그의 치세 동안에 거의 실지 회복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1380년 그가 죽은 후 국정은 재차 문란해지고, 더우기 샤를 6세의 정신병이 악화된 데다 왕족 제후의 대립이 아르마냐크 파와 부르고뉴 파의 항쟁으로 발전하여 국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영국 왕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415년 노르망디에 상륙, 아쟁쿠르의 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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