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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풍수 지리설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
| 요약 |
풍수 지리설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풍수 지리설로 일국의 정책 내지 민심이 동요되었던 것은 결코 고려만이 아니었다. 그 잔영은 유학을 정교의 기본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 초에도 이성계의 한양 천도와 정종의 송도 환도, 태종의 한양 재천도에 이르기까지 고려 일대에 뒤지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풍수 지리설은 조선 왕조가 건국되고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고 마침내 한양에 정도(定都)하는 과정에서도 크게 주목되었다. 하지만 한양 천도는 풍수 지리설의 영향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역사를 주도하는 유학자들의 현실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양의 산수에 대한 설명에서 풍수의 영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도읍으로서의 타당성을 논하는 기준으로 조운과 도리 등이 절대적으로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한양 정도의 배경은 첫째, 개성은 고려 500여 년의 수도로서 주민의 대부분이 전 왕조에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태조의 정치적 기반은 극히 약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고려 말의 빈번한 왜적의 침입으로 조운로가 자주 불통되었고 이 때 한강을 이용한 내륙 수로가 수송에 유리하였는데 한양은 수송로의 요지였다. 셋째, 한양은 개성에 비해 지역이 넓어 도시 계획에 유리하였다. 넷째, 교통의 요지였다. 이렇듯 조선 왕조 초기의 한양 정도를 고비로 풍수 지리설에 따른 천도 논의는 자취를 감추었고 더욱이 유교가 새로운 지도 이념이 된 조선 왕조에서는 그대로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 도참설의 경우 조선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정씨 왕조의 출현 및 계룡산 정도를 예언한 정감록 같은 것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져 때로 정치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조선 왕조는 도참설을 혹세무민하는 것이라 하여 철저히 배척했던 만큼 국가의 운영 방향 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민간에서 부패한 현실을 부정하는 말세적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대신 조선 후기에 와서는 묘자리 선정에 대한 것이 풍수 지리설의 주종을 이루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는 세력 있는 자가 남의 집안의 선산을 침해하여 묘지 쟁송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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