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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조선의 능침제도 |
| 요약 |
조선의 능침제도 조선시대의 왕릉은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이 들어서는 터는 고려시대부터 중요하게 고려한 풍수에 근거하여 택지(擇地)되었으며, 한번 조성한 능이라도 풍수가 나쁜 것으로 판정되면 천장하였다. 조선 초기 능제는『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는데, 조선 건국 후 조성한 정릉(貞陵),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을 통하여 차차 정착되었다. 그리고 그 기본 형식은 조선시대 전시대를 통하여 이어진다. 조선 건국 후 최초로 조성된 능은 정릉이다. 중구 정동에 위치하였던 정릉은 조영 12년만인 1409년(태종 9)에 혜화동 밖 사하리(지금의 정릉동)로 이장되어 지금은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당시의 능침제도는 잘 모르지만 정릉 봉분의 병풍석을 뜯어 보수한 광통교(지금의 광교)의 석재 일부를 보면, 병풍석 문양은 공민왕의 현릉, 노국공주의 정릉과 비슷하다고 한다. 1407년(태종 7)에 태종은 조선이 건국되기 전 돌아가신 그의 생모인 신의왕후 한씨의 묘를 박자청(박자청은 정릉 조성 시 실무를 담당하였다.)에게 왕비릉의 규모로 확장케 하는데, 이 릉이 바로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조성되어 있는 제릉이다. 이 제릉도 공민왕의 능제를 크게 참고한 것으로 본다. 그 후 박자청은 1408년(태종 8) 5월 24일 서거한 태조의 건원릉의 축조를 맡게 되는데, 건원릉도 공민왕릉을 모델로 삼았다. 건원릉 조성 당시 태종과 신진 성리학자들은 현실을 회격실(灰隔室)로, 원로 중신들은 전통적인 석실(石室)을 주장하는데, 태종은 세자를 종묘에 보내어 점을 치게 해서 점괘에 따라 석실로 정하게 되고(『태조실록』 권16, 8년 7월 임신), 이 제도는 조선 초기 능침제도로 확정된다. 건원릉 입구에는 능역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있다. 이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가 정자각 정면으로 기단 아래까지 가다가 동쪽으로 꺾여 정자각 기단 동쪽의 계단으로 연결된다. 참도 중에서 높은 쪽의 신도는 정자각 동쪽의 소맷돌이 있는 계단으로 이어져 정자각 뒤 능의 강(岡)으로 이어지고, 낮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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