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키워드 : |
|
|
| 소개글 |
고려 공예의 정체 |
| 요약 |
고려 공예의 정체
사뇌사 1993년 10월 용화사에서 100여m 정도 떨어진 무심천변의 제방도로를 확장하기 위하여 전주를 이설하던 중에 고려시대의 일괄 유물이 다량 발견되면서 주목된 절이다. 이들 유물들은 대형의 금동광배편을 위시하여 범종, 향로, 촛대, 금강령, 주자 등 다양한데 사찰에서 직접 쓰던 것으로 보여 진다. 378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고려시대의 것이다. 사뇌사에 관한 기록은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에 진각국사가 사뇌사에서 하안거(夏安居)하였다는 내용이 보여서 고려시대에 청주에 있던 또 하나의 대찰로 생각된다. 그리고 진각국사는 고려 후기 지눌을 이은 조계종의 2祖여서 사뇌사는 선종 사찰로 생각된다.한편 사뇌사출토 금속유물의 명문 중에는 『思惱寺』를 『思內寺』로 표현하고 있는 예도 있는데, 이들 思惱, 思內의 표현은 바로 신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흥미롭다. 사뇌사는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절을 일상적으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들 유물이 발견된 운천동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적비가 발견된 곳이고 또 동종이 출토된 운천동사지도 이웃하고 있어서 그러한 연관성을 더욱 생각하게 한다. 청주의 역사 청주(淸州)는 본래 신라의 서원경(西原京)으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로서 중요시 되었다. 신라 신문왕 5년 처음으로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경덕왕 때에 서원경으로 승격되었다. 태조 23년 청주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 2년에 12목을 두었는데 청주는 그 중 하나이다 [자물쇠] 사뇌사 유물의 보존처리 사뇌사 유물은 출토당시 점토와 부식으로 두껍게 덮여 있었으며 여러 점의 유물이 한 덩어리로 겹쳐져 깨지거나 찌그러진 채 발견되었다. 기물에 붙어있던 뚜껑과 손잡이, 받침과 다리 등은 떨어졌거나 유실됐다. 유물이 묻혀있던 땅 속 환경은 침수가 잦아 여러 겹으로 겹쳐진 유물의 틈 사이로 지하수와 점토가 스며들었고 여기서 생성된 부식의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보존처리에 앞서 X선 촬영, 현미경 조사, 녹 분석 등을 통해 정확한 |
 |
|
|
 |
|

위 정보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전재및 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하단의 저작권 침해신고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