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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기해사옥 |
| 요약 |
기해사옥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천주교의 교세(敎勢)는 크게 꺾였으나 그후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1831년에 프랑스의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서는 중국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를 분립시켜 새로이 독립된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를 창설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 1836년(헌종 2)에 밀입국한 프랑스 신부 모방에 이어 샤스탕·앵베르 등이 들어와 엄중한 감시하에서 비밀리에 전교사업이 진행되었고, 신도의 수도 크게 늘어나 1만 명을 넘게 되었으며, 천주교가 민간에 널리 퍼져 사람들이 이를 크게 이상하게 보지 않게 되었다. 청나라에서 아편밀수문제로 영국과의 분쟁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다시 서세(西勢)의 동침(東侵)을 막아야 한다고 하여 박해의 논의가 일어났으며 1839년 3월에 이르러 천주교도에 대한 제2차 대학살을 감행했다. 이 해 정월부터 2월에 걸쳐 교도 수십 명을 검거하고, 3월에 들어서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사교금압(邪敎禁壓)의 주청(奏請)을 올려 허가받았다. 이때 조정에서는 김대비(金大妃)를 중심으로 한 외척 안동김씨에 대립한 헌종의 모후인 조씨(趙氏)의 풍양조씨가 새로 등장하여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천주교 문제는 종교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도집단간 정치적 대립의 성격도 가졌다(→ 순원왕후, 신정왕후). 순조가 1834년 11월에 죽자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아들인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순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김씨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안동김씨 가문에 대항하여 헌종의 어머니인 왕대비 풍양조씨 가문이 영의정과 좌의정을 차지하여 양 세도가문의 대립은 날로 치열해졌다. 김조순(金祖淳)이 1832년에 죽고 그 아들인 김유근(金根)마저 병이 들자 형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차지한 조씨가문이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이면서 천주교에 대하여 온건한 정책을 폈던 정조와 채제공(蔡濟恭)을 비판하고, 역시 천주교에 대해 온정적이었던 대왕대비 김씨의 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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