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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조선의 양명학 |
| 요약 |
조선의 양명학
중국 명나라때의 유학은 양명학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양명학은 조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조선에서 성리학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때문이었을 것으로 볼수 가 있다. 양명학은 자유주의, 개성주의 경향과 주자학에 대한 비판으로 인하여 이황, 박세채, 한원진 등에게 계속 배척을 받았으나 남언경과 이요 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명학을 수용한 사람은 장유와 최명길이며 조선 중기 17세기 전반에 활약한 인물 가운데 양명학에 대한 이해와 견식을 가지고 영향을 받았던 선비로서 장유와 최명길을 들 수 있다. 장유는 당시 조선의 학문이 정주학에 편중되어 있고, 형식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수광·허균·조익 등과 같은 학자들도 중국을 오가며 양명학을 접하였으며 자신의 저술에서 양명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온몸을 바친 애국적인 인물이었으며 남한산성에서 청에 대항할 때에 주화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최명길의 평생 행적은 그의 수많은 소차에 반영되어 있다.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이수광도 양명학에 많이 접하면서 양명학의 우수성을 많이 주장하기도 했다.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양명학의 선구자가 된 학자는 정제두이다. 그는 88세의 생애를 오직 학문에 종사하였다. 학덕이 높아 조야의 존경을 받았고 조정으로부터 30여 차례나 부름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후에 정제두가 강화도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조선의 양명학자들을 강화학파 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가 있다. 특히 정제두는 사서오경을 깊이 연구하여 양명학을 주안으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또한 천문·역법·지리·의학에 이르기까지 실제적 방면에학문을 논하였다. 경학을 근본으로 학문에 종사했던 그의 학풍은 후기 실학의 한 축이었던 하곡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정제두(1649 - 1736) 조선의 후기의 유학자, 양명학자이며, 호는 하곡이다. 20여세 때부터 박세채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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