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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조선시대의 서원 |
| 요약 |
조선시대의 서원 최초의 서원은 소수성원이다. 조선 왕조사에 있어 16세기는 여러 면에서 하나의 전환기였다. 정치적으로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가 흔들려 그 힘을 잃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신분 질서가 흔들려 계층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고 봉건 질서의 빛이 바래고 있었다.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사림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나타났다.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사림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나타났고 그들 중심의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이 제시되었다. 서원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학문의 장, 교육의 장을 명분으로 하면서 실제로는 세력 결집의 장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위정자들이 유교를 지도 이념으로 내세운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곧 유교는 신분적 명분론에 의해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지어미, 양반과 상민, 주인과 노비 사이에 지배 질서를 부여한다. 유교적인 윤리관을 기본으로 삼는 윤리 정치를 이상으로 내세워 그에 따른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성균관, 학당, 향교 등 관학 교육을 강화하고 유학 서적, 유교 의례서 등의 보급에 힘썼다. 관학 교육이 정비된 것은 세종 때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때부터 관학 교육 체계에 이상한 조짐을 보인다. 관학이 출세 도구로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향교의 교관은 질이 크게 저하되었으며 더구나 세조의 집정으로 양식 있는 선비들이 관학 교육에의 참여를 기피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균관, 향교 등 관학은 생도가 미달하였고 그나마 남아 있는 생도는 대개 학문에는 뜻이 없고 벼슬에나 관심이 있는 무능하고 부패한 무리들이었다. 관학의 부진은 16세기에 이르러 극한 상황에까지 이른다. 연산군은 성균관을 연회 장소로 사용하였고 학자들의 독서를 금하기조차 하였다. 이 때문에 관학은 극도로 퇴락해 갔고 공부할 곳을 찾아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서원은 흔히 붕당의 후방 기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것은 사림세력의 정치적 성장을 전제로 하는 논거이다. 사실 16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는 사람에 의하여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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