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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악학궤범의 배경 |
| 요약 |
악학궤범의 배경
조선조 1493년(성종 23)에 간행된『악학궤범』은 조선왕조 건국 이후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예악(禮樂) 문화의 전승을 위해 집대성된 실용적(實用的) 음악 문헌이다. 조선왕조는 고려로부터 국가의례(儀禮)의 제도와 음악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의례의 절차와 의례의 주 내용인 악가무(樂歌舞)의 내용이 미비(未備)하므로, 건국 이후 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유교(儒敎)의 덕목을 중시한 조선 왕조에서는 예악을 완비(完備)하여 치세(治世)의 문화를 일으키고자 노력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서는 ‘종묘(宗廟)에서 조상의 거룩한 덕을 찬미하기 위한 제례악(祭禮樂)을 연주하면 조상이 감격하고, 조정(朝廷)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엄숙함과 존경을 지극하게 하기 위한 연향악(宴享樂)을 연주하면 군신(君臣)이 화합하며, 또 이를 방방곡곡에 널리 퍼뜨리면 교화가 실현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는 데’ 있다고 하여 국가 의례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악학궤범』의 대표 집필자 성현(成俔)은 성종 때에 신축된 장악원을 기념하는 글에서 ‘사람이 음악을 모르면 우울하고 폐색(閉塞) 되어 무엇으로도 그 기운을 펼 수가 없을 것이고, 나라에 하루 동안이라도 음악이 없다면 침체하고 야비하여 무엇으로서도 그 화기(和氣)를 이룩할 수 없다’는 점을 중시하고, ‘문명(文明)을 고무하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음악’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예악(禮樂)을 조화롭게 갖추어 전승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종이 일찍이 ‘나라를 다스림에 예보다 중한 것이 없으나 악의 소용도 또한 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예는 중히 여기면서도 악(樂)에는 소홀하여 이를 익히지 않는 일이 많으니 가히 한탄할 일이다’라고 지적한 것이라든가, 성종이 ‘악이 나라에 소용됨이 큰데도 사람들이 예악의 흥(興)함이 풍화에 관계됨을 알지 못하고 영인(伶人)의 일이라 하여 이를 천하게 여기는 점’을 걱정한 것만 보더라도 예악 전승의 불균형 정도가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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