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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황성신문 |
| 요약 |
황성신문
한말에 창간된 일간신문 황성신문은 고표(股票) 500을 발행하여 창간한 합작회사로 경영되었으나 당시 신문사 수입의 주류인 구독료가 걷히지 않자 1902년 8월 31일 찬조자 5명을 추가하고 고표 300을 더 발행했다. 이때 사원총회를 통해 남궁억을 퇴임시키고장지연을 사장으로 선출했다. 1902년 9월 11~20일 동안 휴간했고 그후 재정이 회복되지 않자 '대호척필'(大呼擲筆)이라는 논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재정궁핍을 호소했다. 1903년 2월 6~8일 다시 휴간하자 〈황성신문〉 재발간운동이 전개되어 성금 1,000원이 걷혀 그 돈으로 한동안 발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1904년 1월 27일부터 2월 10일까지, 5월 17~26일까지 또다시 휴간하게 되자, 고종이 훈령을 내려 신문값 납부를 촉구하는 한편 보신각 근처에 있는 관청 건물을 하사하고 보조금을 지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사설란에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악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글로 장지연은 70여 일 간 구류되고 〈황성신문〉도 80여 일 간 정지당했다가, 1906년 2월 12일 신문이 속간되었으나 장지연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어 3대 사장에 남궁훈, 1907년 5월 4대 사장에 김상천, 그해 9월 5대 사장에 유근, 1910년 6월 6대 사장에 성선경이 취임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대한'이나 '황성'과 같은 단어를 못 쓰게 하자 〈한성신문 漢城新聞〉으로 바꾸었다가 1개월도 안 된 9월 15일 제3470호로 폐간되었다. 〈제국신문〉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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