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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총융청 |
| 요약 |
총융청
총융군은 정군(正軍)·속오군(束伍軍)·별대마군(別隊馬軍)이 통합된 것이었으며, 수효는 약 2만여 명이었다. 그중에서 속오군이 가장 많았으며, 별대마군은 이괄의 난 때 정부군이 크게 밀린 이유가 반란군의 마군(馬軍)이었다는 점을 반영하여 설치한 병종으로 매사(每司)의 중초(中哨)를 이루었다. 총융군의 초기편제는 5영(五營:수원·광주·양주·장단·남양)으로 구성되었는데, 1영에는 3부(部), 1부에는 3사(司), 1사에는 3초(哨)로 편성되었다. 총융군은 일본 등에서 구입된 조총과 활 등의 군기(軍器)를 받았는데, 군기구입 비용으로는 이괄의 난 때 협력한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조달하기도 했다. 군량의 확보를 위해 경기도 각 읍의 삼수량(三手糧)을 대동청에 납부하지 않고 본읍에 두었으며, 둔전(屯田)을 여러 곳에 설치하기도 했다. 군사들에게는 정병의 예에 따라 보(保)를 지급했는데 사노포수(私奴砲手)에게는 공사양역(公私兩役)을 감안하여 정군보다 1명의 보를 더 지급했다. 한편 총융청의 관원으로는 총융사(종2품:1명)·중군(종2품:1명)·천총(정3품:2명)·진영장(정3품:3명)·파총·초관·교련관·기패관 등이 있었다. 병자호란 후 어영군이 청의 잦은 징병(徵兵) 요구에 따라 군사의 차출이 이루어지면서 도성숙위능력이 약해지게 되자, 총융청 군사가 서울에 입번(入番)하게 되었다.
즉 1644년 장초군(將抄軍) 10초와 둔장초(屯將抄) 3초를 뽑아 겨울 3개월 동안 도성에 입번시켜 궁성숙위의 임무를 맡게 했다. 그후 1674년(숙종 즉위) 총 26초의 내영(內營) 체제를 갖춤으로써 총융청은 도성숙위를 담당하는 2부의 내영과 수도외곽의 수비를 담당하는 3영의 체제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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