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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수어청 |
| 요약 |
수어청
1632년 무렵부터 남한산성 방어사는 수어사로 별칭되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수어청은 완전히 독립된 중앙군영은 아니었다. 그런데 1634년 2월 총융사 이서(李曙)가 병으로 총융사의 직책을 구굉(具宏)에게 물려주면서 비변사의 결정으로 총융군과 남한산성군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는 수어청이 독립된 군영으로 정착되는 시발점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반청(反淸) 정책의 하나로 남한산성의 재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수어사 중심의 남한산성 방어체제가 확립되었다. 1652년(효종 3)에는 광주부윤을 수어부사로 삼아 군사·행정 책임을 일원화했고, 1683년(숙종 9) 광주부윤을 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의 책임을 맞게 함으로써 수어청은 단일체계를 갖춘 독립군영이 되었다. 수어청의 관원으로는 수어사(정2품) 1명을 비롯하여 중군(中軍 : 정3품) 1명, 진영장(鎭營將 : 정3품으로 전영장은 본부 판관, 중영장은 양주목사, 후영장은 죽산부사가 겸임) 3명, 별장(別將) 2명(양주목사·이천부사가 겸임), 파총(把摠) 2명, 초관(哨官) 26명, 교련관(敎鍊官) 17명, 기패관(旗牌官) 19명, 별군관(別軍官) 9명, 수첩군관(守堞軍官) 61명이 있었다. 한편 남한산성에는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유사시에 입번할 군사가 할당되었다. 즉 광주진 관할하의 5개읍 군사와 원주·안동·대구 등 3읍의 군사들이 수성군(守城軍)으로 정해져 1만 2,000여 명의 독자적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치른 뒤 산성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안동·대구가 충주·청주로 바뀌었다. 그후 1651년(효종 2) 수어청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충주·청주의 군사 대신 죽산영 소속의 군사를 산성 소속으로 정했다. 그리고 1656년 총융청 소속의 양주군을 이속시켜 군사력을 보강했다. 이로써 남한산성은 광주·양주·죽산 등 경기도의 3개읍과 원주읍 등 4영(營)의 군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수어청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전영(前營)-광주, 좌영(左營)-양주, 우영(右營)-원주, 후영(後營)-죽산 4영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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